카테고리 없음 2010. 2. 23. 20:57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조선 제3대왕인 태종대왕 이방원(太宗大王 李芳遠)의 첫째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9대손이다. - 위키백과에서 -






역시나 피는 속일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양녕이 그렇게 풍류를 좋아했는데, 그 피가 이승기에게 까지 이어진 모양입니다






실록에 보면 양녕대군은 첩 때문에 치열하게 아버지 방원과 대결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여러가지로 살펴보건데, 양녕이 아버지 방원이 세종을 의중에 두었기 때문에 일부러 망나니 같은 짓을 한것이 아니라 성품 자체가 어질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방원의 눈에 벗어나 왕이 돼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세종의 손자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이니 성격 자체가 특이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장수를 했죠


이승기는 성격이 좋으니 다행입니다







이승기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1월 13일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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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이제 묘역 - 양녕대군의 본명은 이제이다







양녕대군 이제 묘역(讓寧大君 李禔 墓域)


지 정 번 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지정연월일 1982년 12월 7일
시       대 조선시대
재       료 석조기단, 목조
소   유   자 사유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 4동 산 65-42




지덕사부묘소는 조선조 3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과 부인인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묘와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양녕대군은 이름이 제(禔), 자는 후백(厚伯),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제(霽)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대군은 태종 4년(140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대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한다든가 하는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 같은 그의 품행은 태종을 비롯한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고, 태종은 수차에 걸쳐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하였으나, 그는 끝내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결국 태종 18년(1418)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에는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대군이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그의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을 받았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삶은 많은 후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되고, 그 결과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지덕사는 숙종 원년(1675) 양녕대군의 외손(外孫)인 우의정 허목(許穆)의 주장에 따라 왕이 그 후손을 불러 벼슬을 제수한 후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대군의 사당을 남대문 밖 오늘날의 병무청 뒤에 세우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다음해 건물이 완성되자 지덕사라 이름하고, 허목이 그 사적을 지어 걸었다. 지덕(至德)이라는 이름의 사호(祠號)는 《논어(論語)》의 "태백지덕(泰伯至德)"에서 유래한 말이다.


지덕사가 건립된 후 숙종 33년(1707)과 38년(1712)에 사우(祠宇)의 중수와 후손의 등용이 있었으며 정조 13년(1789) 왕이 예조로 하여금 지덕사와 청권사(淸權祠)에 사액(賜額)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지덕사(至德祠)'란 세 글자와 '상지십삼년기유납월 보국숭록대부행지중추부사신윤동섬봉(上之十三年己酉臘月 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臣尹東暹奉)'이라 쓴 편액을 지덕사 문미(門楣)에 걸었고, 어제(御製) <지덕사기(至德祠記)>도 현판에 써서 함께 걸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정월에 <지덕사기>의 원본이 현판의 크기보다 컸기 때문에, 다시 크기에 맞게 고쳐 써서 사우(祠宇)의 정간(正間) 기둥 위에 걸도록 하였다. 이어 정조 14년(1790), 순조 26년(1826), 철종 6년(1855), 그리고 고종 10년(1873)에도 건물의 보수가 있었다. 그후 지덕사는 일제의 횡포로 말미암아 1912년 정월에 묘소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지덕사 내의 건물은 중앙에 낮은 화강석 기단 위에 세운 전퇴(前退)를 가진 3칸의 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서고(書庫)와 제기고(祭器庫), 오른쪽에 4대 봉사손 신위가 봉안된 3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본당 내에는 양녕대군의 친필로 전해지는 <후적벽부(後赤壁賦)> 팔곡병(八曲屛) 목각판(木刻板), 숭례문 현판 탁본과 정조(1776∼1800)가 친히 지은 금자(金字) 현액의 <지덕사기>와 허목의 <至德祠記>, 봉사손(奉祀孫) 지광(趾光)의 정서(精書) <지덕사적(至德祠蹟)> 등 귀중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지덕사 뒤에 양녕대군과 부인 김씨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봉분 앞에는 묘비와 2개의 혼유석이 받침돌 없이 얕게 앞의 장대석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무덤보다 한 단 낮은 곳에는 4각의 나지막한 장명등이 서 있고, 그 앞 좌우로 문인석이 2구씩 세워져 있어 당시 대군묘(大君墓)의 규모와 형식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culture.seoul.go.kr/jsp/culturalAsset.jsp?sFrstCode=04&sScndCode=09&sThrdCode=02&sCode=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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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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